• [한희철 목사] 노예의 목소리
  • 18.12.05 13: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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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말이 재미있다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된다는 것이 그렇고, ‘득’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독’이 되며, ‘멍석’이란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명석’이 된다는 말도 그렇고요. 
‘드러내다’와 ‘드러나다’도 그런 것 중 하나라 생각됩니다. 두 말의 차이는 ‘내’와 ‘나’뿐이어서 지극히 작은 차이밖에는 없습니다. 그 말이 그 말처럼 엇비슷해 보이지만 곰곰 생각하면 그 뜻은 사뭇 다릅니다. ‘드러나다’가 자동사인 반면, ‘드러내다’는 사동사입니다. ‘드러내다’가 무엇인가를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밝히는 것이라면, ‘드러나다’는 어떤 의도나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 밝혀지거나 묻혀 있던 것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 기계하고 친하지를 못하고 나서서 하는 일을 싫어하기에 한동안 멀리하던 한 SNS를 얼마 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맡은 일과 관련하여 어쩔 수 없다 여겨져 최소한의 활동만 하기로 했지요. 그런데도 고민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내용을 어디까지 올려야 하나, 다른 이의 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고민이 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SNS를 통해 자신의 글이나 생각, 경험이 담긴 사진 등을 올립니다. 자신의 글을 올리는 것은 어떤 심리일까요? 댓글을 달거나 ‘좋아요’를 누르는 등 누군가의 글에 반응하는 것은 어떤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때로 내가 올린 내용에 댓글이 많이 달리거나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이 많으면 괜히 마음이 흐뭇해지기도 하고, 생각보다 반응이 없으면 뭔가 허전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반응을 보이면 즐거운 마음은 더욱 커지고요. 
글을 올리는 것은 좋은 생각이나 경험을 나누려는 것이지만, 나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고민이 이영광 시인의 산문집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를 읽으며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책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만났거든요. 
“치부를 숨기듯 영예를 숨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영예를 자랑하듯 치부를 자랑하는 이들도 있다. 자기 PR이라니, 그러고 수줍어서 어떻게 다니나. 나 잘 해요, 나 좀 봐줘요, 나 쓸모 있어요…이것은 노예의 목소리가 아닌가.” 
노예의 목소리라는 말이 선명하게 와 닿았습니다. ‘살 만큼 살고 죽을 만큼 죽어본 듯한 어린 얼굴들이 늘어간다…. 이것은 사회가 아니다.’라고도 말하는 시인은 일상처럼 자리 잡은 시류에 대해 어깃장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방 똥침을 날리고 있다 싶었습니다. 우리들의 숨은 심리를 냉정하게 돌아보게 하고 있었지요. 
시인의 말대로라면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 하여도 나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노예의 목소리’를 따르는 것과 다르지 않겠다 싶습니다. 노예의 목소리를 따르는 것보다는 내 목소리를 지켜가는 것이 더욱 소중한 선택이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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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주 (당시 9 세)
김성주 (당시 9 세)
* 성 별: 여
* 신 장: 120cm
* 두 발: 짧은 편이나 뒤로 묶음
* 상 의: 흰색 바탕의 어깨는 주황색 반팔 티셔츠
* 하 의: 주황색 칠부바지
* 신 발: 하늘색 샌들
* 신체특징: 쌍꺼풀 있는 눈, 가마가 특이함, 눈주위에 흉터, 왼쪽 어깨에 콩알만한 점, 말이 어눌함.
* 발생일자: 2000년 6월 15일
* 발생장소: 전남 강진초등학교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