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영상 작가] 비의 무게
  • 18.11.01 11: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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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내렸지요. 비는 늦은 밤부터 조용조용 내렸습니다. 창가에 서서 보안등불 아래로 떨어지는 밤비를 늦도록 보았습니다. 소리 없이 내리는 가을비에 아파트 마당에 둘러선 나무들이 한껏 몸을 낮추었습니다. 순응하기를 즐기는 나무들의 천성이 지난 밤엔 아름답기까지 했지요. 
아침에 뒤뜰 느티나무 오솔길에 나갔지요. 비는 이미 그쳤고, 대신 더러더러 떨어지던 느팃잎이 길 위에 폭 내려앉았습니다. 느팃잎을 밟지 않고는 한 발짝도 뗄 수 없을 만큼 오솔길이 샛노래졌습니다. 한적한 모퉁이 길로 찾아 들어온 가을이 한 고비를 맡고 있습니다. 나는 그길로 내처 남부순환로를 건넜습니다. 
우면산으로 들어서는 길은 여기서부터 시작이지요. 길은 비에 젖은 낙엽으로 요란합니다. 온통 수북수북 낙엽잔치입니다. 느팃잎, 은행잎, 산벚잎, 팥배나무잎에 아카시나무잎, 그러고도 더 있네요. 졸참나무 잎과 생강나무 잎, 잎사귀가 넓고 큰 산목련나무 잎까지, 잎이란 잎들이 곱게 떨어져 있습니다. 
천천히 산길을 오릅니다. 떨어진 낙엽들인데 낙엽들도 아직 더 가야 할 길이 있는 걸까요. 마치 먼 길을 가는 대열처럼 산길을 따라 노랗게 띠를 이루고 있습니다. 조금만 오르자니 산자락과 달리 길 앞에 젖은 삭정이들이 툭툭 떨어져 있습니다. 이들도 어느 한때 나무의 인생을 위해 크게 한몫을 하느라 웬만한 바람과 비에도 위세를 부리던 나뭇가지였겠지요. 그런 그들이 앙상한 채로 떨어져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네요. 늙은 아카시나무 한 그루가 길을 턱 가로막고 쓰러져있습니다. 산비탈을 자신의 거처로 삼아온 노회한 나무지만 그도 지난 밤비에 힘없이 쓰러졌습니다. 비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 했던 거지요. 비라고 하지만 지난 밤비가 나무를 쓰러뜨릴 만큼 대단한 비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대단한 바람도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그저 늦가을을 재촉하는 촉촉한 잔비에 불과했지요. 그 잔비가 종일 밤을 내려 마른 삭정이를 적시고, 마른 나무 등걸을 적시고 그 속에 천천히 배어들었던 거지요. 그러는 사이 나무는 종내 그 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 쓰러졌던 거겠지요. 
그게 잔비라 할지라도 종일 밤을 고요히 내려 숲을 적시면 비의 무게에 잎은 떨어지고, 마른 삭정이와 마른 나뭇등걸도 그만 살던 손을 놓게 되는 거지요. 
우리가 한밤을 비 없는 방 안에서 조용히 지내는 동안 바깥세상에선 이런 일이 일어난 겁니다. 해마다 겪는 일이라 우리는 아, 낙엽이구나! 하지만 나무에겐 생과 사의 순간인 셈이지요. 잎을 잃고, 함께 했던 나뭇가지들을 떠나보내고, 함께 산비탈을 지켜왔던 이웃을 잃는 일이니까요. 그와 동시에 기온도 한 발짝 겨울 쪽으로 다가가 서늘해졌습니다. 
산을 한 바퀴 돌아 나오다가 내가 걸어온 길을 다시 바라봅니다. 
그러고 보니 가을비처럼 소리 없이 조용조용 우리를 무너뜨려온 게 있네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시간의 무게입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맞이하고 떠나보낸 시간의 무게는 마치 밤새도록 내린 가을비처럼 우리의 어깨를 짓눌렀지요. 그 탓에 우리의 머리는 희끗희끗해지고, 피부는 조금씩 탄력을 잃고, 욕망은 천천히 부피가 줄었지요. 그러나 그 대신 말씨는 부드러워졌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더 너그러워졌고, 생각은 웅숭깊어졌지요. 모두 시간의 무게가 만들어놓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다만 더 바랄 것은 우리의 가을이 낙엽처럼 곱고 아름답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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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 (당시 15 세)
김도연 (당시 15 세)
* 성 별: 남
* 신 장: 152cm
* 두 발: 스포츠 형
* 상 의: 빨간색 티셔츠
* 하 의: 회색 츄리닝
* 신 발: 흰색 운동화
* 신체특징: 정신지체 1급, 이마 바로위 머리속 내 10cm수술자국, 치아가 아주 불규칙, 오른쪽 귀 뒷부분 1cm 수술자국
* 발생일자: 2001년 1월 29일
* 발생장소: 경주 보문단지 한국콘도 앞